2020. 6. 29. 23:19

헛간을 태우다로 버닝 읽기

이 책을 접하게 된 계기는 단연 버닝을 보고나서 버닝의 원작이 따로 있다는 소식을 접했고, 심지어 그 원작이 내가 좋아하는 작가 중에 한명인 무라카미 하루키라는 점 때문에 바로 이 무라카미 하루키의 단편집 <반딧불이>를 구입했다.

반딧불이는 수록된 여러 단편들 중에 하나인데, 한 남자가 어렸을 적 친구였던 그녀를 만나면서 그녀를 만났던 학창시절 죽은 그녀의 남자친구를 회상하며 그의 자취방에 있는 반딧불이를 투영시킨다.

이 장면은 후에 <노르웨이의 숲> 우리에겐 <상실의 시대>로 알려진 작품으로 이어진다. 묘하게 다른 단편이나 그의 작품 스타일과는 달랐던 비하인드가 마지막 작가의 말에 담겨있는데, '중앙공론'이라는 잡지에서 청탁받고 잡지의 특성상 리얼리즘이 담긴 색채로 그려내려고 노력했다는 이야기이다.

그가 평소에 비의식적이고 초현실적인 이야기들을 많이 써내려가는 작가라는 것을 알고있었다면 반딧불이와 노르웨이 숲은 읽으며 당혹스러움을 느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런 당혹스러움은 이내 춤추는 난쟁이편으로 넘어가면 으레 알고있었던 하루키로 돌아온다. 살아있는 코끼리를 생산하는 공장에서 만난 예쁜 여성을 꼬시기 위해서 전설속 춤추는 난쟁이를 몸에 빙의시켜 무도회장에서 여성을 꼬시는 이야기. 하지만 그것은 난쟁이가 그의 몸을 얻어내기 위한 함정이었고 난쟁이가 등지고 있던 혁명군에게 쫓겨 숲속을 전전하게 된 남자.

정말 당혹스럽고 신비스러운 이야기지만 흡입력있는 이야기가 그의 특장점이다. 위의 내용을 읽고 정말로 줄거리가 맞냐고 물어볼지도 모르지만 정말 각색없이 글이 써져있는 것을 그대로 요약하자면 위와 같다.

각 단편들 속에서 노르웨이의 숲이나 해변의 카프카, 1Q84, 여행 에세이같은 다양한 스타일의 글들을 느낄 수 있다. 짧게 그의 다양한 스타일을 탐독할 수 있다는 것은 하루키 팬으로서 굉장히 만족스러웠다.

다만 적은 분량임에도 불구하고 양장으로 만들어 두껍게 포장해 비싸게 파는 것 같아서 그게 좀 아쉽다. 비양장본으로 한 9000원 정도의 소비자가였으면 정말 더 알차게 느껴졌을텐데.

이제 본격적으로 이 책을 읽게 된 계기인 버닝과 헛간을 태우다에 대해서 이야기 해볼까 한다. 우선 영화 버닝과 헛간을 태우다는 유사한 점이 굉장히 많지만 정말로 각기 다른 내용을 가지고 있다. 물론 몇몇 장면들은 정말 모티브가 됐구나하는 것들이 있다. 예를 들어 대마초를 나눠피우는 장면에서 동시존재에 대한 대사나 그녀가 귤에 대한 펜토마임을 설명하는 장면 등이 바로 그것이다.

하지만 그 이외에 것은 너무나도 판이하다. 일단 종수역의 남자가 유부남이며 영화에서 표현된 것처럼 시골사람이나 가난한 것과는 거리가 멀다. 아버지가 정신적인 질환이 있거나 과거 어머니가 불에탄 경험같은 것도 전혀 설정에 없다.

특히 헛간을 태우다는 이야기가 중간에서 끊긴다. 여자도 실종되었다고만 나왔지 굳이 찾으려고 하지 않고 그냥 그렇게 흘려보내지만 종수는 여자에 대한 애틋한 마음을 가지고 밴을 의심하며 끝까지 그의 행적을 파악하려고 한다. 또한 사소하지만 헛간도 비닐하우스로 대체된다.

이둘의 차이는 극명하지만 전체적인 핵심과 의도는 어느정도 일치한다. 바로 그저 메타포에서 그칠 것. 의심하게 만들 것.

영화 버닝에서도 여러 정황 증거들만 밴이 그녀를 죽였다고 가리킬 뿐, 직접적인 묘사나 상황은 전혀 나오지 않는다. 소설 헛간을 태우다에서도 '그녀가 실종됐다'와 그 '남자가 헛간을 태우는 취미가 있다' 사이에는 아무런 인과관계도 없다. 단순히 우리의 상상이 그 사이를 메우고 있을 뿐이다.

영화적인 기법도 한몫했다. 버닝은 뚜렷히 누군가의 시점, 눈을 공유하지 않고 카메라의 방향을 흐렸다. 처음에 종수를 비추는 듯했던 카메라가 가게에 멈추고 다시 해미에게로 전달된다. 그녀의 자취방에서 정사를 가질 때에도 머나먼 하늘로, 종수의 집에서 대마초를 할 때 해미가 춤을 출때도 저 산너머를 향해 날아가는 카메라의 초점.

이 카메라의 초점이 종수의 이야기도 아니고 해미의 이야기도 아니고 밴의 이야기도 아닌 말 그대로 각자의 이야기가 동시존재하고 있는 것이다. 도덕적인 사람이 항상 도덕적일 수는 없듯이 도덕적이라는 것은 하나의 관념일 뿐이고 그것을 행하는 사람을 규정하고 제약하는 틀이 아니다.

따라서 그 사람은 선행을 하면서도 동시에 악행을 저지를 수 있는 것이다.

"저는 판단 같은 거 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태워지기를 기다리는 겁니다. 저는 그 사실을 받아들일 뿐입니다. 아시겠어요? 그곳에 있는 것을 받아들일 뿐입니다. 비와 같은 거죠. 비가 온다. 강이 넘친다. 무언가가 떠내려간다. 비가 판단을 합니까? 보세요. 저는 절대 비도덕적인 것을 지향하는 게 아닙니다. 전 저 나름대로 도덕이라는 것을 믿습니다. 도덕은 인간 존재에 무척 중요한 힘이죠. 도덕 없이 인간은 존재할 수 없습니다. 전 도덕이라는 것은 동시 존재의 균형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동시 존재?"
"즉 나는 여기에도 있고, 저기에도 있다. 나는 도쿄에도 있고, 동시에 튀니스에도 있다. 야단치는 것도 저고, 용서하는 것도 접니다. 이를테면 그런 겁니다. 그런 균형이 있는 거죠. 그런 균형없이 우리는 살아갈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말하자면 물림쇠 같은 겁니다. 그게 없으면 우리는 스르르 풀어져서 말 그대로 조각조각이 날 겁니다. 그게 있기 때문에 우리의 동시 존재가 가능해지죠."

반딧불이 69p 中

판단을 유보하도록 설계된 작품이 버닝이라지만 메타포를 뛰어넘어서 사실 나는 캐릭터에 좀더 집중해서 버닝을 보고싶다. 밴은 사이코라기 보다는 그의 대사처럼 불태워지길 기다리고있는 헛간을 찾아 자유롭게 해준다는 관점에서 바라본다면 그녀가 처한 상황, 빚이 있고 희망이 없는 상황에서 상호합의하에서 말그대로 헛간을 태운 것이다.

이렇게 생각한 이유가 바로 밴의 태도에 있었다. 헬스장에서 러닝머신을 하면서 종수가 몰래 자신을 미행하면서 감시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그를 묵인하고 오히려 그가 조금은 무례하게 굴어도 다 받아주며 심지어 그가 살해당하는 장소에도 그가 만나자는 말에 의심없이 인적드문 곳으로 단걸음에 달려온다. 사실 마치 밴도 헛간이며 태워지길 기다리는 것처럼. 밴과 종수는 그런 식으로 균형을 맞추는 물림쇠 같은 존재가 된다.

작가의 말에서 하루키는 헛간이라는 단어 barn이 외국에서는 다르게 받아들여지는 문화적인 차이에 살짝 당황했다고 했다. 그가 의도한 헛간은 시골에 작고 초라하며 아무도 오지 찾지 않는 그런 공간을 생각했는데 외국의 헛간은 크고 도구들로 가득차있어서 그가 의도한 헛간과는 차이가 있다고 생각했다.

헛간이란 재력의 유무나 그 사람의 인간관계를 떠나서 어떻게 의도되는지가 중요한 것 같다. 헛간 자체는 가만히 그 자리에 있다. 헛간은 그 자체로 판단하지 않는다. 그저 그곳에 있는 것을 받아들일 뿐이다. 그녀나 밴 또한 그렇듯이, 그들은 무언가에 의해 떠내려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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